철학으로 진화한 무도의 기록, 강준의 『주먹』 – 싸움을 넘어선 선택의 예술 읽기
한 권의 책이 ‘강함’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뒤집는다. 기술의 경지를 보여주는 무술서가 아니라, 선택과 자제, 통제력의 순간을 사유하는 인문서. 공권유술 창시자 강준이 쓴 『주먹』(좋은땅출판사)은 싸움의 기술이 아니라 싸움의 이유와 멈춤의 철학을 묻는 예술적 탐색이자 인간 내면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결과물이다.
이 책은 ‘언제 주먹을 쥐고, 언제 내려놓아야 하는가’라는 한 줄의 질문에 무게를 더한다. 독자는 이 단순한 물음 속에서 폭력의 미화도, 격투의 승패도 아닌, 깊은 인간성과 선택의 윤리를 마주하게 된다. 이 작품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리고 무술, 예술, 철학이 어떻게 하나의 서사로 합쳐질 수 있는가?
선택과 자제의 철학으로 재해석된 무술
『주먹』은 공권유술이라는 독특한 배경에서 나왔다. 단순한 격투 기술의 나열을 넘어서, 강준은 기술 한 동작마다 ‘결단의 순간’을 조명한다. 예컨대 암바(arm bar) 기술은 상대의 관절을 꺾는 기술이지만, 이 책에서는 그것이 "상대의 저항을 이해하고, 멈출 지점을 감지하는 감수성"으로 확장된다. 기술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행위자의 태도와 책임을 수반하는 윤리적 행위로 정의되는 것이다.
공격을 위한 수련이 아닌, 멈춤을 위한 단련. 강준은 수십 년간의 수련 끝에 깨달은 '무도의 본질'은 강함의 증명이 아닌 통제력의 성찰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공권유술의 핵심 철학이기도 하다 — 지키는 무술, 멈출 줄 아는 용기를 기른다는 점에서, 이 책은 무술과 철학의 중첩 지점에 서 있다.
그림으로 새기는 싸움의 본질: 직관적 미학
강준은 무도인인 동시에, 글과 그림으로 싸움을 기록하는 예술가이다. 책 안에는 저자가 직접 그린 13점의 연필 드로잉과 짧은 서사가 함께 실려 있다. 이는 단순 장식이 아니라, 감성적 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독자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자극한다. 발끝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멈춘 주먹, 그 후의 침묵— 드로잉은 기술 중심의 이미지가 아니라, **"행위가 남긴 공기와 여운"**을 전하는 시각적 언어다.
미술 평론가 존 버거가 말했듯,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 강준이 그린 선들은 주먹의 움직임보다는 그 주먹을 쥐게 만든 ‘내면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이로써 『주먹』은 도서임에도 불구하고 전시를 보는 듯한 감각을 남긴다.
싸움이라는 은유: 우리의 일상, 관계, 그리고 내면
『주먹』은 궁극적으로 ‘싸움’을 삶의 은유로 사용한다. 직장에서의 갈등, 가족 간의 오해, 혹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 모두가 ‘주먹을 쥘 것인가, 내려놓을 것인가’의 순간을 요구한다. 저자는 말한다. “매트 위에서 어떤 자세로 버티느냐보다 중요한 건, 어디서 물러설지를 아는 용기다.” 이는 무도에 국한되지 않은 보편적 메시지이며, 현대적 관계에서 점점 결핍되어 가는 태도이기도 하다.
또한 사회 내부의 공격성과 경쟁을 지나치게 부추기는 문화 속에서 『주먹』은 강함에 대한 재정의를 시도한다. 강함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힘이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는 힘이 되어야 한다는 진지한 제안은 독자에게 공감의 여지를 넓힌다.
멈출 줄 아는 사람이 진정 강한 이유
이 책에서 가장 큰 통찰은 강준이 반복해서 전하는 메시지에 담겨 있다. “진짜 승리는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을 잃지 않는 데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apatheia, 감정의 절제)’와도 통한다. 자기 감정과 욕망에 침식되지 않는 평정의 태도는, 이 책에서 말하는 진짜 무도인의 강함이자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이런 맥락에서, 『주먹』은 인간의 내적 현상으로서의 싸움을 다룬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삶의 문장으로 번역된 무도이며, 윤리의 실천으로 치환된 격투라 할 수 있다.
짧지만 깊은 철학성을 지닌 『주먹』은 무술 수련자뿐 아니라 자기 통제, 갈등의 해법, 혹은 윤리적 삶의 방식에 관심 있는 누구에게나 유효하다. 삶의 긴장 속 ‘쥠’과 ‘놓음’의 균형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책은 인문학적 레퍼토리로 더없이 적절하다. 지금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등 주요 서점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마치 하나의 전시를 관람하듯 한 꼭지씩 천천히 읽어보자. 그리고 당신의 삶에서 ‘주먹’은 지금 어떤 자세로 있는지를, 조용한 마음으로 한번 되물어보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