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롭, 드롭, 드롭’에 스며든 현실 판타지 – 설재인의 단편 세계에서 만나는 연대와 구원의 순간들
일상을 살아내며 종종 외면하게 되는 구석진 감정들, 그리고 말없이 사라지는 존재들의 이름 없는 역사는 문학이 가장 진심으로 응시해야 할 풍경일지도 모릅니다. 소설가 설재인의 네 번째 단편 소설집 『드롭, 드롭, 드롭』(슬로우리드 출판)은 그런 면에서 지금 우리의 시대 정서를 가장 예민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담아낸 ‘현실 판타지’입니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흔들리는 축 위에서 작가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질문을 던집니다. “멸종의 시대에 인간성은 어디로 향하는가?”
이 책은 단지 네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산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실금처럼 조용히 생겨나 어느새 커다란 단절을 만들어버리는 사회 현상들—비혼, 지방 소멸, 가정폭력—그리고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연대와 공감에 대한 문학적 해답입니다. 수많은 찬사 뒤에 설재인 작품이 새삼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음 세 가지 해석을 통해 그 진정한 매력을 짚어봅니다.
1. ‘멸종’이라는 은유로 풀어낸 사회적 소외의 풍경
설재인은 『드롭, 드롭, 드롭』에서 ‘멸종’이라는 다분히 생태학적인 개념을 문학적으로 확장시켜 사용합니다. 표제작 속 비혼 여성과 반려동물의 관계, 『멸종의 자국』에서의 기억 너머에 남겨진 고통의 흔적들은 더이상 사회의 ‘주류’가 아닌 존재의 좌표를 보여줍니다. 멸종은 단지 생물종의 사라짐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삶의 형태’에 대한 사형 선고인데, 설재인은 이를 휴머니즘과 연대의 언어로 섬세하게 풀어냅니다.
2. 현실에 발을 딛고 환상으로 도약하는 ‘설재인식 판타지’
작가가 말하는 판타지는 중세적 상상이나 기묘한 모험담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환상처럼 느껴지는 일상의 파편들입니다. 『미림 한 스푼』의 어린 여자아이에게 건네는 ‘최초의 구원’은 우리 사회 가장 아래로 꺼진 사람들에게도 닿는 문학의 손길을 제시합니다. 비현실적인 구조보다 훨씬 강력한 현실 인식이, 설재인의 판타지를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죠.
3. 음악적 리듬과 감성으로 직조된 내면의 파열
『쓰리 코드』는 한 지방 여성의 펑크 록에 대한 좌절된 열망을 통해, 단절된 지역성과 젠더 정체성의 교차점을 드러냅니다. 독자는 단순한 줄거리 이상의 정체성과 현실의 파열음을 마치 리프처럼 반복하는 내면의 부름을 듣게 됩니다. 이는 설재인이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까지 ‘보이지 않는 리듬’을 부여해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문학의 감각이 어떻게 리듬과 결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탁월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4. 유머와 예리함을 넘나드는 작가 시선의 탁월함
설재인의 글은 무겁지만 결코 무겁지 않고, 슬프지만 결코 침전하지 않습니다. 위트와 통찰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능력은 이 단편집의 또 하나의 미덕입니다. 그는 복잡한 사회 문제를 독자에겐 무리 없이 접근 가능하게, 그러나 그 여운은 오래도록 남게 만드는 감각적 구조를 사용합니다. 이 점은 문학평론가 김지연이 “설재인의 언어는 독하게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어떤 연민도 접어두지 않는다”고 언급한 대목과 맞닿아 있습니다.
문학은 오늘을 견디기 위한 버팀목이며, 내일을 꿈꾸기 위한 상상의 공간입니다. 그러하기에 『드롭, 드롭, 드롭』은 우리가 지금 읽어야 할 단편집입니다. 어디서도 들리지 않던 이들의 목소리를 응시하는 작품 속 인물들과의 만남은, 우리 안의 연대를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드롭, 드롭, 드롭』의 주요 메시지는 명료합니다. “멸종의 시대에도, 우리 서로는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단지 문학을 넘어, 시대를 향한 조용한 실천이기도 합니다.
책장을 덮은 후, 다음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제안합니다. 인근 서점에서 『드롭, 드롭, 드롭』을 구매해 직접 읽어보거나, 비혼·비정규직·지역 소멸 등 소외된 주제를 다루는 다른 현대 단편집이나 다큐멘터리를 함께 감상해보세요. 또는 자신만의 ‘드롭’의 순간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해보는 것도 개인적 창작의 문을 여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문학이 제공하는 ‘다정한 타인의 시선’을 나의 감각으로 옮기는 경험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