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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으로 소비된 혁명의 서사

감정으로 소비된 혁명의 서사

"혁명은 어떻게 허구가 되는가 –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한 전투 또 다른 전투』를 통해 본 감정의 미학과 정치의 공허"

혁명은 행동이자 서사, 상징이자 현실이다. 시대의 모순을 극적으로 투영하는 가장 강렬한 무대이자, 예술이 감히 다룰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주제 중 하나. 폴 토마스 앤더슨의 신작 ≪One Battle After Another≫는 바로 이 혁명이라는 서사를, 장려한 영상미와 감각적인 서사기법으로 그려내며 관객을 전율과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 혁명은 현실이 아닌 ‘감정’ 안에서 소용돌이칠 뿐, 그 기원을 향한 설명은 공백에 머문다. 이 영화는 과연 새로운 정치영화의 가능성을 열었는가, 혹은 감성적 소비를 넘어설 수 없는 유려한 장식에 그쳤는가?

1. 혁명은 이야기인가? – 이념 없는 저항의 감각적 스펙터클

≪One Battle After Another≫는 미국이라는 실재 공간을 기이하게 변형시킨 대체 역사 속에서, 무장 좌파세력 ‘프렌치 75’가 펼치는 저항을 따라간다. 임시수용소 습격, 정치인의 선거사무소 폭파, 은행과 송전탑 파괴 등 급진적 사건이 연이으며 국가 권력의 폭력성과 억압도 신랄히 묘사된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조직 내 비판, 이념적 토론, 전략적 고민 없이 일련의 '감정적 결기'로만 묘사된다.

영화 이론가 장-뤽 고다르가 ≪중국 여인≫에서 제시한 “혁명이란 사회 전체의 지지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말은 이 영화 안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에 머문다. 프렌치 75의 폭력은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예술적 충동으로 소비된다. 이 지점에서 앤더슨의 정치적 ‘비유’는 스탠리 큐브릭류의 상징주의적 접근보다, 오히려 MTV식의 이미지 편집에 가깝다.

2. 인물은 상징인가? – 감정의 초상화이자 정치적 결여

앤더슨의 영화에서 캐릭터들은 심리적 내면성보다 상징적 장치로서의 역할에 머문다. 티야나 테일러가 연기한 퍼피디아는 흑인 여성의 분노와 성적 주체성을 감각적으로 상징하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캐릭터는 마약과 퇴폐로 살아가는 전직 투사의 몰락을 보인다. 특히 성적 모티프의 활용은 과감하면서도 논쟁적이다. 섹슈얼리티는 억압의 전복인가, 상품화된 저항인가?

비평가 리처드 브로디는 “앤더슨은 정서적 충동과 심미적 순간들의 앙상블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결국 사회적 맥락이나 역사적 실제를 삭제하며, 인물의 ‘상징성’조차 내면화하지 못한 채 유려한 외형으로만 머무는 한계를 드러낸다.

3. 공동체 없는 혁명 vs. 공동체로 귀환하는 저항

영화는 16년의 시간 경과를 통해 혁명의 비극적 종결과 그 이후를 조명한다. 초기의 허영적 급진주의가 트라우마로 변주되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저항의 방점은 커뮤니티 기반의 조직화된 연대와 구조 활동으로 전환된다. 바크탄 크로스라는 가상의 도시 안에서 암암리에 조직된 탈출망은 마치 ‘작은 지하철도’처럼 기능하며, 이 비유는 미국 흑인 해방사에 대한 참조로 읽힌다.

영화는 ‘폭력적 혁명’에서 ‘삶의 양식으로서의 저항’으로 의제를 옮기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점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인물은 오히려 보수 세력의 군사 지휘자인 스티븐 J. 록조(숀 펜)다. 그의 욕망과 권력의 동기는 명확하고 정치적 맥락 속에 굳건히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주인공들은 동기조차 명쾌히 설명되지 않은 채, 감상적인 분노에 기댄 허상의 이상향을 좇는다.

4. 스타일은 메시지를 넘어서지 못하는가? – 감각의 정치성과 그 경계

앤더슨 특유의 형식적 기교—긴 러닝타임 속 빠른 장면 전환, 탁월한 편집 리듬, 인물 간 대사와 긴장감의 교차—는 영화 자체를 하나의 시청각 퍼포먼스로 만든다. 그러나 이 형식은 점차 ‘스타일 그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구조적인 딜레마에 봉착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혁명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단지 혁명의 ‘미장센’에 지나지 않는가?

이는 미국 극작가 수전 손택이 말한 “이미지의 폭력은 실제의 고통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주장과도 상응한다. 혁명의 실천은 결여되고, 그 자리를 예술적 열망과 시청각적 쾌락이 채운다. 결과적으로 앤더슨은 파국의 시대를 종합적 감정의 황홀경으로 가공했을 뿐, 명확한 정치적 세계관을 구축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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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One Battle After Another≫는 강렬한 미학적 거장성과 비판적 결여가 공존하는 영화이다. 혁명은 이 영화 속에서 더 이상 공동의 목소리가 아닌, 등장인물들의 감정 배틀로 환원된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적 재현은 관객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이 허구의 혁명은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예술을 통해 사회적 저항에 공감하거나 외면하고 있는가?”

이 작품을 관람할 독자라면, 영화를 넘어 ⟪La Chinoise⟫(1967)나 ⟪Zabriskie Point⟫(1970) 같은 ‘정치의 현장성과 예술의 이상주의가 맞닿은 고전’들과 병행 감상하기를 권한다. 더 나아가, 함께 본 작품에 대한 해석을 문화 비평 커뮤니티나 소셜 플랫폼에서 논의하며, 동시대의 저항 문화나 사회운동의 사유 방식에 대한 질문을 독립적으로 전개해보자. 혁명이 실제가 아닌 허구로 다뤄지는 시대, 예술은 오히려 현실을 되묻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